년 5월, 애플의 창업자이자 CEO인 스티브 잡스가 쫓겨났다가 돌아온 뒤 첫 작품으로 아이맥을 내놓았을 때 일이다. 아이맥은 본체와 모니터가 하나로 돼 있고 사탕 색깔의 속이 비치는 반투명 케이스를 뒤집어 쓴 독특한 스타일의 PC였다. 스티브 잡스는 시사 주간지 ‘타임’과 인터뷰에서 그때 일을 이렇게 회상했다.
“디자인 스케치를 기술팀에 들고 가니까 엔지니어들이 무려 서른여덟 가지 이유를 들면서 못하겠다고 버텼습니다. 저는 말했죠. ‘아니다. 우리는 이 걸 할 거다.’ 그랬더니 왜 해야 되느냐고 묻더라고요. 저는 끝까지 우겼습니다. ‘내가 CEO니까 내 말대로 하자. 이 건 될 거다.’ 그렇게 결국 제 고집대로 밀고 나갔고 그해 아이맥은 크게 히트를 쳤습니다.”
신제품 설명회에 나온 잡스는 늘 색이 바랜 청바지에 운동화, 그리고 검은색 터틀넥 셔츠 차림이다. 소문에 따르면 그에게는 수백 벌의 똑같은 셔츠가 있다고 한다. 무슨 옷을 입을지 고민할 필요 없이 일에만 몰두할 수 있다는 이유에서다. 대중에게 비친 그는 늘 자신만만하면서도 위트에 넘치고 소탈한 모습이지만 직원들에게는 고집불통의 폭군으로 군림한다.
인터뷰에서 잡스는 이렇게 회상하기도 했다. “그 때 애플을 떠난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사실 제가 해고한 사람들이죠. 그들 대부분은 이제야 나를 이해하게 됐다고 말합니다. 나는 지난 7년 동안 이런 식으로 일해 왔습니다. 그리고 이제 애플 사람들 누구나 내 방식을 이해합니다. 이해 못하면 나가야죠.”
이런 그에게 애플의 부사장이면서 수석 디자이너인 조너선 아이브는 최상의 파트너라고 할 수 있다. 아이브가 아이맥의 후속 모델인 뉴 아이맥의 모형을 들고 갔을 때였다. 새로운 디자인은 훌륭했지만 아무래도 잡스의 마음에는 들지 않았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아이브를 돌려보냈다가 다음날 아침 일찍 그를 집으로 불렀다.
“불필요한 부분은 하나도 없어야 돼”“아무래도 안 되겠어. 처음부터 다시 시작합시다.” 잡스는 좀 더 혁신적인 디자인을 원했고 1년 동안의 노력이 수포로 돌아가게 된 아이브는 하늘이 노래지는 기분이었을 것이다. 두 사람은 잡스의 부인이 가꾼 텃밭을 산책하고 있었다. “이 꽃들처럼 불필요한 부분은 하나도 없어야 돼. 모니터 뒷부분을 어두컴컴하게 내버려 두려면 뭐 하러 평면 모니터를 쓰겠어?”
아이브는 해바라기에서 아이디어를 얻었고 다음날 오후 새로운 스케치를 가져왔다. 지름 27cm의 반구형 본체에 모니터가 정말 해바라기처럼 솟아있는, 언뜻 탁상용 전기 스탠드처럼 보이는 완벽하게 새로운 디자인이었다. 잡스는 그때서야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엔지니어들과 싸워가며 이 아이디어를 상용화하기까지 꼬박 2년이 더 걸렸다.
애플의 디자인 철학은 ‘다르게 생각하기(think different)’와 ‘사용자 친화적(user friendly)’이라는 말로 정리할 수 있다. 아이브는 잡스의 기대 수준이 너무 높다고 불평하곤 했지만 늘 그런 기대를 완벽하게 만족시켰다. 잡스가 아이브를 신뢰하고 전폭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는 것도 그 때문이다.
하드웨어를 만드는 IBM이나 소프트웨어를 만드는 마이크로소프트와 달리 애플은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를 모두 만들어 판다. 최근에는 윈도우를 실행할 수 있는 애플 컴퓨터가 출시되기도 했지만 애플은 맥OS에서만 구동됐고 상대적으로 호환성과 시장 점유율이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완벽을 추구하는 잡스의 고집 때문이다.
‘CNN’은 “잡스가 애플의 소프트웨어를 자신이 해고할 수 없는 다른 누군가가 만든 하드웨어에서 돌리고 싶어 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지적하기도 했다. 잡스는 이와 관련해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소프트웨어와 하드웨어를 따로 만들면 혁신적인 아이디어를 반영할 수 없습니다. 사용자 인터페이스에 책임을 지려하지 않기 때문이죠. 그러면 혼란만 남게 됩니다.”
잡스의 드라마틱한 인생 역정은 잘 알려져 있다. 1955년 2월, 태어나자마자 버려져 입양됐고 대학에 입학했다가 3학기 만에 중퇴, 코카콜라 병을 팔아가며 생계를 유지했다. 애플이라는 이름으로 부모님의 창고에서 컴퓨터 사업을 시작한 때는 스무 살이 되던 1975년. 이 회사는 10년 만에 직원 4000명에 시가총액 20억 달러의 거대 기업으로 컸다. 그러나 탄탄대로를 밟을 것 같았던 그는 서른 살 되던 해 이사회에서 쫓겨난다. 혁신적인 아이디어를 쏟아냈지만 그는 타협할 줄 모르는 독불장군이었고 경영진과 의견 대립이 끊이지 않았다. 애플의 초기 디자인에 참여했던 제프 래스킨이 “잡스가 가는 곳에는 배신과 다툼, 편 가르기가 끊이지 않았다”고 말한 것도 그가 왜 쫓겨났는지를 설명해준다.
잡스는 2005년 6월 스탠퍼드대학 졸업식 축사에서 그때를 회상하며 “계주에서 바통을 놓친 선수처럼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기분이 들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는 의욕적으로 새로운 일을 찾기 시작했고 전 재산을 털어 넥스트라는 교육용 컴퓨터 회사를 만든다. 루카스필름의 애니메이션 자회사인 픽사를 사들이기도 했다.
넥스트의 실적은 그리 좋지 못했지만 다행히도 픽사의 애니메이션 영화, ‘토이스토리’와 ‘벅스라이프’, ‘몬스터주식회사’ 등은 기대 이상의 흥행을 했다. 잡스는 재기에 성공했고 1997년 6월 넥스트를 애플에 팔아넘기고 임시 CEO로 복귀한다. 잡스는 그때를 회상해 “정말 독하고 쓰디 쓴 약이었지만 그런 약이 필요한 환자도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돌아온 잡스는 다시 무소불위의 권력을 행사하기 시작했다. 아이맥 G5를 개발하던 무렵, 잡스는 “눈에 보이는 나사가 하나도 없어야 한다”고 지시했다. 그런데 디자이너 가운데 한 명이 손잡이 아래 부분에 나사가 하나 있는 모형을 보여줬고 그는 곧바로 해고됐다. 폭군이었지만 그의 결정은 대부분 옳았다. 애플은 다시 전성기를 맞게 됐다.
애플의 혁신적인 기능과 디자인은 누구나 인정했지만 문제는 가격과 호환성이었다. 마이크로소프트의 윈도우가 공전의 히트를 기록하던 무렵이었고 사람들은 굳이 애플 컴퓨터를 두 배 이상의 가격을 주고 사야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그때 잡스의 아이맥이 나왔다. 아이맥은 컴퓨터에 패션을 입혔다. 한 번 보면 빠져들 수밖에 없는 매력적인 디자인이었다.
아이맥을 이야기할 때 아이브를 빼놓을 수 없다. 잡스가 영감의 원천이라면 아이브는 그 영감을 구현하는 사람이다. 1967년 영국 출생의 그는 철저하게 베일에 가려져 있다. 애플에 스카우트되기 전까지 탄제린이라는 디자인 회사에서 세면대나 욕조, 변기 등을 디자인했다는 정도만 알려져 있을 뿐이다.
잡스가 애플을 떠나있던 무렵은 아이브에게도 고통스러운 시간들이었다. 다른 많은 회사의 디자이너들처럼 그 무렵 아이브는 비용을 절감하라는 경영진에 맞서 싸워야 했다. 그러나 복귀 이후 잡스는 아이브가 자신의 아이디어를 현실로 만들어줄 적임자라는 걸 알게 됐고 29세의 아이브를 부사장으로 임명했다. 아이브가 쫓겨날 준비를 하고 있을 때였다.
그렇게 우여곡절 끝에 만들어진 아이맥은 케이스 제작에만 65달러가 들었다. 천편일률적인 사각형 케이스를 만드는 다른 컴퓨터 제조업체들이 20달러도 채 들이지 않는다는 걸 감안하면 애플의 디자인 철학을 이해할 수 있다. 아이브는 제대로 된 사탕 색깔을 만들기 위해 사탕 공장을 여러 차례 방문했고 수천 개의 케이스 샘플을 만들어야 했다.
애플의 제품군은 고급 사용자를 위한 파워맥과 파워북, 일반 사용자를 위한 아이맥과 아이북으로 나뉜다. 여기에 도시락 크기의 맥 미니가 있고 한때 G4 큐브도 나왔지만 큰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다. 2004년에 나온 아이맥 G5는 순백색에 역시 모니터 안에 본체가 들어간 ‘올인원’ 스타일이었다.
“우리는 절대적으로 꼭 필요한 이 외의 것들을 모두 제거하길 원했습니다. 그러나 우리 노력을 알아주는 사람은 많지 않았죠. 우리는 계속 원점에서 다시 시작해야 했어요. 크게 달라진 게 없어보일지도 모르지만 이 정도 크기에 이 정도 기능을 집어넣기까지 우리는 어마어마한 도전을 해야 했습니다.”
애플 디자인의 절정은 역시 아이팟이라고 할 수 있다. 잡스와 아이브가 MP3플레이어를 만들면서 정한 원칙은 다음과 같았다. 하늘 아래 절대적으로 새로울 것, 허우대만 멀쩡한 게 아니라 실제 사용할 때 기능성을 충분히 갖출 것, 컴퓨터와 연결할 때 최고 속도를 낼 것, 그리고 무엇보다도 무조건 예뻐야 한다는 것 등이었다. 아이팟은 2002년 10월 출시 이후 18개월 동안 80만 대가 팔렸고 순식간에 70% 이상의 시장 점유율을 차지했다. 잡스의 자신감은 하늘을 찌를 듯했다. “최고의 제품이 아니면서도 승리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마이크로소프트의 윈도우처럼 말이죠. 그렇지만 대개는 최고의 제품이 승리합니다. 아이팟처럼 말이죠. 아이팟의 승리는 계속될 겁니다.”
2001년 이래 아이팟의 누적 판매량은 최소 4500만 개 이상으로 추산된다. 소니가 워크맨을 출시한 후 3년간의 판매량이 300만 개였다는 걸 돌아 보면 아이팟의 인기를 새삼 실감할 수 있다. 아이팟은 애플의 외형을 넓혀줬다. 잡스는 올해 1월 맥월드 엑스포에서 회사 이름을 애플컴퓨터에서 애플로 바꾸겠다고 선언했다.
아이팟은 비디오 파일까지 재생할 수 있는 5세대까지 나왔고 플래시 메모리를 쓴 아이팟 나노와 최근에는 클립처럼 생긴 아이팟 셔플도 인기를 끌고 있다. 애플은 최근 아이폰을 출시하고 휴대전화 사업에도 뛰어들었다. TV에 연결해서 동영상 콘텐츠를 즐길 수 있는 아이TV를 출시하기도 했다.